시간이란 무엇인가?의 질문에 선뜻 답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도 살아오는 동안 시간이라는 것에 곰곰이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시간이 무엇인지 고민해야하는 이유는 인간이면 시간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네이버<국어사전>에 시간을 검색하니 ‘1. 어떤 시각에서 어떤 시각까지의 사이’라고 나온다. 2. 같은 말 ‘시각’은 시간의 어느 한 시점. 한 마디로 골 때린다. 다람쥐 쳇바퀴 돌기다.
다시〈시간〉에 대한 통합검색을 해 보았다.
고대 철학자에게로 간다. 시간도 철학적인 문제인가보다.
고대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을 "이전과 이후라는 관점에서 보여지는 운동의 수"라고 한다. 더불어 이런 운동의 수는 셈을 할 수 있는 인간의 영혼과 관계되어 있다고 보았다.
중세 어거스틴은 신이라는 영원과 대비 시간은 피조물에서만 볼 수 있는 양식으로 시간은 참된 존재가 아니다라고 한다. 시간은 영혼속에만 존재하며 영원에 돌아갈 것을 최종목표로 한다.
“영혼은 기대하고, 지각하며, 기억한다.”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가 아니라 과거의 현재, 현재의 현재, 미래의 현재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과거의 현재는 기억으로, 현재의 현재는 직관으로, 미래의 현재는 예기로 표현할 수 있다.
어렵다.
그나마 내 가슴에 와닿는 철학자는 마틴 하이데거다.
하이데거는 시간을 존재와 관련지어 ‘현존재의 존재로서의 시간성’을 통해 시간의 개념에 접근한다.
현존재의 존재란 인간이 본래 이러이러하게 되어있다라고 하는 근원적인 모습을 말한다. 시간성의 기본 구조는 "기재하면서 마주하는 도래로 표현하는데, 즉 도래, 기재, 마주함의 근원적 통일성이 시간성이다.
여기까지는 어렵게 느껴진다.
모든 사고의 출발을 '무엇인가?'에서 시작되는 정의적인 서양적 사고방식탓 일 수 도 있다. 우리들의 유전자 내면에는 동양적 사고방식이 흐르고 있다.
이를 아는 하이데거는 다음의 문구로 공감을 일으킨다.
"우리자신이 곧 시간이며, 시간이 곧 우리 자신이다"해서 '시간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시간이란 누구인가' 라고 물어야 된다"
시간이 무엇인가의 물음으로는 사고의 진척이 없었다.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고, 더 깊게 사고하기에 일반인인 나로서는 한계를 느꼈다. 하이데거의 상기 문장으로 “시간을 잘 사용할 줄 아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꾸어 시간 개념을 살피는 것이 오히려 쉬운 듯했다.
나는 시간을 이렇게 사용하고 싶다. 기억하고, 기대하며 보내는 삶의 만남들 속에 다시 만나고, 한 번 더 사랑하고, 그리워하길 원한다. 그것이 사람, 책, 자연 무엇이든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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