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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철학인문 일반글
피타고라스의 생애(1)
입력 2012-02-01 오후 1: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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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타고라스의 아버지는 Mnesarchus이고, 어머니 Pythais는 Ancaus가의 자손이다.

Mnesarchus는 Pythian의 신탁에 의하여 Arcadia와 Thessaly뿐만 아니라

Athens, Epidaurus 그리고 Chalcis로부터 사람을 데려와서

Samos섬을 식민화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피타고라스는 Apollo의 아들이라 불리우기도 했는데,

그것은 Mnesarchus가 Pythian의 신탁에서 장차 그의 아들로 태어날 이가

‘아름다움과 지혜에서 지금까지 살았던 어떤 이들보다 뛰어나며,

사람들의 삶과 관련된 모든 면에서 인류에게 가장 위대한 이득이 될

아들을 가지게 되리라'라는 예언을 얻은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Mnesarchus는 Phoenicia의 Sidon에서 아기가 태어났을 때,

피타고라스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이름은 Pythian의 신탁과 Apollo에 의하여 예언되었다는 의미를 가진다.


고대 신학에 따르면, 진정한 영웅으로 불리는 신적인 본성을 타고난 이들

 ― 그들은 고통을 느끼지 않고 순수하다 ―

과 수동적이고 불완전한 채 지상으로 내려온 수많은 인간들의 영혼 사이에는

그에 걸맞은 지위가 따르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또 이 세계에는 정신적으로든지 심지어 육체적인 본성에 이르기까지

빈자리는 없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가장 우등한 지위와

신으로서 가장 열등한 지위 사이에는

그들을 연결하는 고리가 반드시 존재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신성을 부여받은 인간 영혼들은 사람들이 영웅이라 여겼던 이들과

매우 비슷한 모습으로 인식되었기에

고대 사람들은 이들을 ‘지상의 영웅’이라 불렀다.

이와 같은 영혼들은 한편으로는 다른 영혼들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또 한편으로는 신들 중에서 선발된,

인간 사회와의 유대 관계 지속을 위해, 인간 세상으로 내려온다.

예를 들면 헤라클레스, 플라톤, 테세우스

그리고 피타고라스와 같은 사람들이 이러한 지위에 있는 영혼들이었다.

Mnesarchus는 시리아 여행에서 큰 부자가 되어 돌아와서

Pythias의 비석이 있는 Apollo의 신전을 지었다.

그는 또한 어린 아들을 위하여 당대의 가장 뛰어난 선생들을 초빙하였다.

한때는 Creophilus가, 다시 Pherecydes, 시리아 스승,

그리고 사실상 그 당시에 특정한 관심분야를 지배하던

모든 사람들이 그의 교육에 참여하였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교수진이

피타고라스를 위해 구성되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하여 그는 역사의 연대기에서 칭송되어 왔던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신과 같은 사람이 되었다.

피타고라스는 어린 나이였음에도 너무 위엄이 있고 절제되었기 때문에

비록 나이가 더 든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를 예우하고 존경하였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피타고라스가 살아있는 신의 아들이라고 확신하기까지 했다.

피타고라스는 또한 경건함과 절제로, 초월적으로 선한 삶의 방식으로,

영혼의 굳건함과 이성의 명령에 적절히 복종하는 신체로도 칭송 받았다.

모든 말과 행동에서도 그는 어떤 순간에도 노여움이나 웃음,

경쟁이나 말다툼 혹은 어떤 다른 행동의 동요에 의해서 지배받지 않는

흉내낼 수 없는 평온함과 침착함을 보여 주었다.

모든 곳에서 그 젊은이는 “긴머리의 Samian”이라 칭송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성스러운 영감의 영향하에 있는 자로 존경을 받았다. 

피타고라스가 대략 18세가 되었을 때

 ― 당시 그가 살던 사모스는 독재자 Policrates의 치하였다. ―

자신의 학문이 간섭받는 것을 두려워하여,

한때는 자신의 스승이었던 Creophilus란 별명을 가진 Hermodamas와 함께

한밤중에 은밀히 그곳을 떠나 Pherecydes, 자연철학자인 Anaxamander

또 Miletus의 Thales에게 가 그들을 스승으로 삼았다.

그의 모든 스승들은 피타고라스의 천부적인 재능에 경탄하였으며,

그들의 학설을 전달해 주었다.

Thales는 자신의 학문을 전달하고나서

피타고라스에게 가장 현명하고 비범한 사람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주면서

이집트로 가서 Memphian과 그 자신이 가르침을 받았던

Jupiter의 Diospolitan 수도사들과 교류하기를 권하였다.

Thales는 또한 시간을 아끼는 것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피타고라스는 술과 육식을 완전히 삼가고,

살찌지 않고 소화시키기 쉬운 양분만을 섭취하는 것으로 스스로를 단련시켰다.

그 결과 그의 수면시간은 짧았으며,

그의 영혼은 언제나 깨어있고 순수하였고,

그의 신체는 완전하고 변함없는 상태에 있었다.

피타고라스는 그 후, 자신의 출생지인 Sidon으로 배를 타고 갔는데,

거기서 생리학자 Mochus의 후손(예언자들임)과

Phoenicia의 신비의식 도사들과 교제하였다.

그리고는 Byblus와 Tyre의 神秘 儀式과

Syria에서 널리 퍼져 있던 성스러운 수술 비법을 전수받았다.

신들의 비밀이나 수수께끼에서 배울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면

어느 것이나 그의 관찰이 미치지 않는 것이 없을 만큼 열정적이었다.

종교적인 의식을 이집트로부터 들여온 Phoenicia와 다른 식민지들에서

많은 지식을 취한 피타고라스는 이러한 모든 가르침이 유래한 땅으로 가는 배를 태워줄

이집트의 뱃사람들이 Mount Carmelus 근처에 있는 해안에 상륙하게 되는 기회를 가졌다.

뱃사람들은 이집트에 도착하면

상당한 돈을 받고 노예로 팔 계획을 가지고 그를 반갑게 맞아들였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너무나도 침착하고, 기품 있고, 사려 깊은 행동에 감명을 받아서

해안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그가 배에서 내리는 것을 도와주었으며,

가장 깨끗한 장소로 데려가서는 산더미 같은 과일을 베풀었다.

배에 있는 이틀밤 사흘 동안 그는 음식도 술도 함께 하지 않았으며,

잠을 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던 점도 그들을 감명시키는 데 어느 정도 작용했다.

― 그곳의 사원에서 피타고라스는 대부분의 시간을 은둔 속에서 지냈다 ―

22세의 피타고라스는 그의 연구를 면밀하게 추구하면서

또 가르침으로 유명한 모든 장소와 지혜로 칭송 받는 모든 사람들을 방문하면서

이집트에 머물렀다.

Cambyses의 군인들에 붙잡혀서 Babylon으로 보내어 질 때까지

피타고라스는 천문학과 기하학을 연구하였고,

신들의 수수께끼에 관하여 철저하게 전수받았다.

여기서 Magi는 그에게 그들의 오래된 지식에 따라 지도하였으며,

그는 대수학과 음악 그리고 기타 여러 분야에서 최고조에 도달하였다.

12년 후 그는 Samos로 돌아갔으며, 거기서 56세가 될 때까지 있었다.

Samos에서 피타고라스는 그가 얻은 모든 것들을 나누어줌으로써

모든 사람들을 이롭게 할 수 있는 길이 있겠느냐는 제의를 공식적으로 받았다.

사실 피타고라스는 기호를 이용하여 가르치는 것을 가장 유용하게 생각하였는데,

이러한 방법은 많은 그리스인들에 의하여 개발되었으며,

대부분의 고대인과 이집트인들이 특히 그것을 존중하였기 때문에

당시에는 매우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피타고라스는 기호들이 가진 중요성과 비밀스러운 뜻이,

나중에 명확하게 펼쳐져서, 다시 말해 비밀스러움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탁월한 정확성과 진실을 발전시킨 것에 주목하였다.

그 결과 피타고리안들, 특히 가장 오래된 피타고라스 추종자들은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과의 담화나 논문 혹은 주석서들에서

이러한 가르침의 방식을 받아들였다.

그들의 저술이나 그들이 출판한 모든 책들은

평이하고 통속적인 용어로 씌어져서 즉각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비밀스러운 양식을 좇아 단위화 된 것들을 이용해

그들의 성스러운 비밀을 감추는 방법을 채택했으며,

이 방법은 그들 사이에서의 저술과 회의에도 사용하고 있었다.

즉 어떤 특정한 기호들을 선택한 사람이,

거기에 대해 적절한 설명을 통하여 그 의미를 펼쳐 보여주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들을 우스꽝스럽거나 어리석고 쓸모 없는 것으로

가득 차고 단지 말이 많기만 한 것으로 여기게끔 말이다.

그렇지만 내포된 의미가 이러한 기호들을 통해 펼쳐지면

그들은, 심지어는 무식한 대중이라도, 분명하고 명백한 의미를 알게 되며,

지성과 박식을 겸비한 사람들에게는 성스러운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예언적인 말과 Pythian Apollo의 신탁과 유사한 것으로 밝혀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기호들 중 약간은 다음과 같다.  

심지어 네가 문 앞에 서 있다 할 지라도

무심하게 사원에 들어가지 말며

조심성 없이 찬미하지 말라.

맨발로 희생하며, 찬미하라.

널리 알려진 길에서 떨어져

자주 가지 않는 길을 걸어라.

식견 없이 피타고라스의 관심사를 이야기하지 말라. 

 

그러나 이러한 기호를 사용한 교수법은 Samian들에게 어필하지 못했으며,

아무도 그의 강의에 출석하지 않았으며,

이와 같은 훈련 또한 진정으로 바라지는 않았다.

여기에 관심을 가진 한 추종자는 체육 경기에 시간을 쏟는 한 가난한 소년이었다.

피타고라스는 그에게, 만일 그가 자신이 젊은 시절에 이방인에게 배웠고,

이제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잊혀져가고 있는 어떤 훈련을,

단계적이고 쉽게 그러나 계속적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의 육체적인 운동에 도움을 주는 데 필수적인 모든 것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 젊은이가 필요한 지원을 얻는다는데 대한 희망으로 그 제안에 동의하자

피타고라스는 주판에다 그의 대수와 기하의 보기들을 만들어내고는

그가 배우는 모든 모양마다 3 oboli를 보상으로 주었다.

마침내 그 젊은이가 이와 같은 공부의 아름다움이

자신을 완전히 사로잡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피타고라스는 가난과 무능력으로 인하여 더 이상 3oboli를 줄 수 없다는 척 했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저는 이것들이 없어도 당신의 학문을 배우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고 대답했다.

그러자 피타고라스는

“그러나 나는 나 자신에게 충분한 음식을 제공해 줄 수 있는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하고,

안정적으로 일상의 필수품들을 확보하기 위하여 일을 할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주장과 헛되고 어리석은 추구로 내 마음을 어지럽힐 수 없다”

고 말하였다.

계속 공부하기를 원했던 그 젊은이는

“훗날에는 황새가 그러하듯이 제가 당신에게 드리고

당신의 친절에 보답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제 차례가 되면

제가 매 모양마다 3oboli를 드릴 테니까요.”

하고 대답했다.

모든 Samian 사람들 중에서 그만 홀로 피타고라스와 함께

원래 살던 나라로부터 사모스로 이주해와서는

똑같은 이름(피타고라스)을 갖게 되었으니, 바로 Eratocles의 아들이었다.

이 Samian 사람이 지은 「운동에 있어」라는 세 권의 책이 있다고 전해지는데,

이 책이 Mnesarchus의 아들인 피타고라스의 책으로 잘못 전해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

대략 이 즈음에 피타고라스는 Delos를 방문하여

피를 흘리지 않는 Apollo의 재단에서 참배하고는 모든 추종자들과 함께 Oracles로 갔다.

그는 Crete와 Sparta에서 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법에 익숙해지기 위한 의도로. 

그가 방문하는 도시마다 학교를 설립했는데,

그 학교들은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도 '피타고라스의 반원'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도시의 바깥에다 그의 철학에 맞게 지은 동굴을 짓고,

그곳에서 그는 많은 시간을 보냈다.

피타고라스는 동굴에서 Jupitor의 아들인 Minos의 방식에 따라

지적인 개념들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을 훈련하고 연구하는 데 헌신했다.

피타고라스 후대의 사람들은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원리에 따라 만들어진 지식만으로

그들 자신을 훌륭한 것으로 받아들이곤 하였던 것을 생각해 보면

그의 이러한 공부 태도는 매우 이례적이며 누구라도 모범으로 삼을 만하다.

피타고라스는 천체과학을 완성하였으며,

그 전부를 대수와 기하의 지식으로 설명하였다.  

철학(피타고라스는 그 자신을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 즉 philosopher라 했다.-역자 주)

이 보다 보편적인 것이 되었고,

전 그리스인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

그의 박식함에 동참하기 위하여 Samos로 왔다.

시민들도 피타고라스가 사모스로 온 그들과 함께

공공 업무 관리에 참여해 주기를 원하였다.

이런 시민의 요구는 바로 피타고라스의 정치적 지위가 높아졌다는 것과 다름 없었다.

피타고라스는 더 이상 동굴에 머물면서 철학에 정진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배우는 것에 대하여 바른 자세를 지닌 사람들이 가장 많았다고 알려진, 

그래서 그가 머물기에 가장 적합한 곳으로 판단한

Crotona(현재 이탈리아에 위치-역자 주)로 가기로 했다.

피타고라스는 약 600명의 추종자와 함께 Crotona에 도착했다.

그들은 피타고라스처럼 철학을 공부하는 데 열성이 있었고,

보통의 삶에 있어서 미덕에 관한 우호적인 분류에 동의하였다.

그런 연유로 그들은 Coenobitae라는 명칭을 얻었다.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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