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저의 착한 여자1]
- 난 말야, 박정희라는 사람을 존경하기로 했지, 머리가 기가 막히게 돌아가는 놈이야, 재작년 선거 유세 때 그가 했던 말 생각나니? 아마 그때 김대중이가 우리에게 경고를 했었지, 여러분, 만일 이번에 또 박정희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이 된다면 우리는 다시는 우리 손으로 대통령을 뽑을 수 없을 겁니다. 그러자 응수라도 하듯이 박이 말했었지... 여러분, 여러분이 한 번반 더 저를 청와대로 보내주신다면 맹세코 다시는 이 자리에 서지 않겠습니다. 맹세합니다. 여러분...
어때? 멋지지 않니?
-먼 옛날, 아주 작은 수의 사람들만이 이 세상에 살고 있을 때, 인간이 거대한 자연을 경의하고 가만히 그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 그 대가로 예지력을 가지고 있었을 때 인간들은 아무도 사랑을 시작하지 않았다. 사랑의 대가로 치러야 할 일이 너무 많은 것을 알았던 것이다. 나무 열매를 따고 물고기를 잡고 꽃을 머리에 꽂은 일의 수만 배의 에너지를 써서 사랑이라는 걸 하기에는 그들은 너무 피곤했기 때문이다. 단 몇초 간의 성적인 쾌락을 얻는 것으로 만족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대가들을 치러야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섹스조차 기피하기 시작했다. 출산과 수유 그리고 양육을 위한 여분의 노동... 그래서 지상에 살아있 는 인간들의 수가 줄어가기 시작했다.
걱정이 된 신은 다른 종류의 인간들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유전자의 일부분에 장밋빛을 칠해놓은 것이다. 일단 그 유전자가 활동하기 시작하면 물고기를 잡거나 나무 열매를 따거나 심지어 출산의 극악한 고통까지도 아름답게 채색 되었다. 하지만 신도 힘이 들었는지 그 기간을 길게 채색해주지는 못했다. 왜냐 하면 신은 합리적인 존재여서 존족의 번식이 우선 필요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인간을 신처럼 행복하게 만들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신이 인간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그저 신의 한계였다. 그리하여 인간은 그 채색된 유전자의 장난으로 한평생 마음의 고통까지 져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것이다.
-예전에는 우체국일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면 제 방에 들어가 책을 보거나, 책도 손에 잡히
지 않는 날에는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가르쳐준 화투패를 떠 보며 내일은 오늘 과 다르기를 빌었지만 이에 그럴 필요가 없었다. 마치 마술사가 짠, 하고 마법을 건 것처럼 모든 것이 새롭게 채색되어 제 빛깔로 빛나고있었다. 이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사물들이 그렇게 다양한 제 색깔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처음 안 일이 었다. 강한 인상을 가졌던 정인의 얼굴은 부드러워졌고 뺨은 팽팽해지고 윤기 있어졌으며 늘 아래로 처져있던 입술 끝은 살짝 위로 치겨져서 얼굴 전체가 동그스름한 인상마저 주게 되었다. 사람들은 처음으로 저 처녀가 참 귀염성이 있구나 하는 걸 발견하기 시작했다. 정인은 이제 막 피어나려고 하는 목련꽃 봉 오리처럼 순결하고 힘찼으며 그러면서 부드러웠다.
-하지만 정인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 채 서있었고 현준은 이번에는 다가와 정인을 끌어안고 다시 한 번 입을 맞추었다. 뜨거운 입술이었다. 저항하려고 생가하면서도 정인은 마치 뜨거운 욕조에 몸을 담근 것처럼 꼼짝하지 못한다.
현준의 한손이 정인의 등줄기를 따라 내리다가 가슴을 어루만지기 시작한다. 정인은 처음으로 제 몸이 반응하는 어떤 이상한 치밀어오름을 느낀다. 온몸이, 만일 활짝 피어나는 꽃봉오리 위로 이슬이 내린다면 이슬을 머금을 것이고 황사바람이 분다면 싯누런 먼지를 흉하게 덮어 쓸 것 같은, 비가 내린다면 비를 버금을 것 만 같은 예감... 작은 바람에도 파들거리는 대숲 잎새가 지워지고 대숲 너머 걸려 있는 초여름의 짙푸른 하늘, 엷게 떠 있는 아기 구름 한조각... 어떻게 여기까지 왔나... 하는 생각이 아득하게 정인의 머리를 스쳐갔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구름처럼 흩어지고 정인은 눈을 감는다.
'제가 사랑하면 안 될까요... 제가 헛되지 않게 해드리면 안 될까요?... 제가 따 뜻하게, 제가 당신의 마음 속에 들어가서 다시는 바람처럼 흩어지지 않도록 제가 사랑을 드린다면..."
스물한 살짜리 정인을 어리석다고, 경솔하다고 당신들은 생각하는가? 아마도 그런 생각을 하는 당신들은 참으로 행복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비꼬는 의미라곤 조금도 없이 행복하고 현명하며 지혜로운 선택만을 해왔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감히 행복하다고 할 수 있다. 만일 그것이 불행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않는다면... 그런데 그날 이 오정인이라는 우체국에 근무하는 시골 처녀는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다. 이것은 바로 나의 선택이다, 하고...
-누워서 보는 하늘은 언제나 다르다. 서서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히고 보는 하늘과도 또 다르다 하늘은 언제나 하늘인데 바라보는 그 사람의 자세가 어떻느냐에 따라 사물이 바뀌어지는 것이다.
-얇은 먼지에 덮여 있지만 여전히 광채에 빛나는 현준의 구두... 명수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그
구두의 천박한 광택처럼 현준의 삶이 다른 지옥을 헤매고 있는 것을 자명은 물 론 안다. 자명은 이번에는 여자의 작은 구두를 바라본다. 낡은 여자의 구두는 해어져 있었다. 뒤축이 까져서 원래의 갈색이 빛을 바래고 있는 구두... 저 여자는 헤매어 다닐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그저 그 여자의 길이라고, 그는 감히 말해도 되는 것인지... 자명은 그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발길을 돌려버렸다.
-슬플 때 짜장면을 먹어 본 사람들은 안다. 비는 내리고 기다리는 사람이 오지 않을 때 짜장면을 먹어 본 사람은 안다... 그때, 나무 젓가락을 쪼갤 때 나는 작은 소리조차 마음을 가르고... 그 짠맛과 그 값싼 기름기가 비벼주는 위안... 숟가락을 따로 들지 않고 단촐한 접시에 담긴 그 검은 액체가 비벼 먹는 국수의후두둑거림이 주는 위안에 대해서.
-정인은 말하자면, 이런 생각이었다. 사랑이라는 것, 빗속에서 다섯시간을 혼자보내면서 자신이 기다렸던 것은 결코 이런 것이 아니었다고... 그것이 섹스를 포함하든 하지 않든, 자신이 기다렸던 것은 보다 다른 종류의 따뜻함, 보다 다른 종류의 위안들, 애틋함들이었다고.... 그런데 저 남자는 정인을 보면 달려들 뿐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원하는 의미가 다른 것이다.
물론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데에는 분명 육체적인 이유들이 포함되어 있을거라고 정인은 생각하고 있었다. 바로 그것이 여자와 남자가 다른 점일 거라고.
왜냐하면 그녀와 육체적인 접촉을 가지는 순간에만 현준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사람이 그저 자신을 기준으로 생각하기가 쉬운 법인 것처럼 정인은,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가 그토록 자신을 지속적으로 만나 잠자리를 같이할 리라 없다고 제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정인은 현준이 화가 났을 까봐 갑자기 두려운 기분이 들었다.
- "너는 이 세상에서 제일 놀라운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러자 석가의 사랑을 받는 그 제자는 대답하였다. "이 세상에서 제일 놀라운 일은 모든 인간이 하나도 빠짐없이 언젠가는 죽을것인데도 모든 인간이 하나도 빠짐없이 자기가 죽으리라는 걸 잊고 산다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놀라운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 누가 인간들의 마음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싫다고 하는 사람은 붙잡고 싶어지는 마음. 쫓아오는 사람에게는 달아날 수 있을 때까지 달아나고싶은 마음. 그래서 남자와 여자의 줄다리기는 계속되고,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더욱 터 애
틋하게 마음 속에 화인을 남기는 것일까.
-눈물에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자와 이야기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있다. 배고픔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가장 낮은 곳에 엎드려 본 경험이 있는 인간, 고작 손바닥만한 배를 채우기 위한 밀가루 덩어리를 얻기 위해 자신의존재를 진창 속
에 버려 둔 경험이 있어 본 인간... 진실로 정면으로 그것과 마주 서 보았던 인간은 아마도 삶의 비의를 엿본 인간이 아닐까... 그리하여 다시금 이야기 하자면 이제 외로움에 젖은 밥숟갈을 들어 보지 않은 자와는 삶을 이야기할 수 없으리라. 외로워도 고픈 배. 자신의 동물성이 가장 드러나는 그때. 차마 미워할수 없는 자신의 육체가 전하는 배고픔 때문에 밥숟갈을 드는 그때를 정면으로 바라본 인간은 아마도 그 황량한 삶의 뒤안길을 걸어 본 인간일 것이고 삶의 뒤안길 을 걸어 본 인간만이 가장 낮은 곳에 엎드려 있는 인간들을, 그 슬픔의 덩어리인 존재를 위해 진실로 손내밀 수 있으리라.
- "고통이라는 건 말야... 고통의 본질이라는 것은... 그러니까 그것이 끝나지 않을 거라는 공포에서 오는 거야... 하지만 이것도 끝나... 끝난다는 사실을 생각해... 길게 느껴져도... 영원히 계속된다고 느껴지는 건, 바로 고통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려고 그렇게 겁을 주는 거라구... 정인아 기억해... 설사 그것이 길게 느껴진다 해도 고통은 언젠가 끝난다는 거..."
-여자들은, 아이를 낳아 본 여자들은 그래서 어머니라는 여자들은... 그래서 강한 것이 아닐까... 그들은 사선을 넘어본 사람들이니까. 한 생명을 만들어내기 위해 죽음을 넘어 본 사람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