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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우리는 경쟁적 대립관계에 있는 것일까?
입력 2009-07-20 오전 6: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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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초, 막상 대학에는 들어갔는데 왜 대학공부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불교철학과목을 선택하여 그 의문을 풀어보려고 하였다. 마침 담당 교수님은 연세가 지긋하신 분이었다.

나는 수업을 받으면서 여러 가지 질문을 했으며 이윽고 다른 학우들로부터 영양가 없는 쓸데없는 질문을 한다고 눈총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부득이 수업이 끝나 교수님이 강의실 문을 나서면 따라가면서 질문을 던졌다. 그 때 교수님이 나의 질문공세를 퇴치할 한 꾀(?)를 생각해 내시고는 역공을 가하기 시작했다.

“자네는 닭이 먼저 생겨났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달걀이 먼저 생겨났다고 생각하는가? 이 해답을 찾은 후 나를 찾아오게.”

그 때부터 해답을 찾기 위해 잔머리를 굴리기도 하며, 선배들을 찾아 물어보기도 하고 또한 도서관에서 책을 뒤지기도 하였으나 마음에 딱 드는 해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빈손으로 교수님을 다시 찾았다.

“선생님,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공돌이가 이렇게 불교철학을 선택과목으로 신청한 것 아니겠습니까?”

교수님은 한 참 동안 나를 쳐다보시더니 또 다시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그럼 공돌이 질문을 해 보지, 속도가 자네의 반밖에 안 되는 친구가 50M 앞선 장소에서 출발하였고, 자네는 50M 뒤처진 곳에서 출발하였다면 그 친구를 추월할 수 있겠는가? 만약 자네가 50M를 따라갈 동안에 그 친구는 25M를 달려갈 것이고 또 다시 자네가 따라가면 그 반만큼은 달려나갈 것일세. 이 문제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면 나를 찾아오게.”

나는 혹을 떼려다 오히려 혹을 붙이고 나왔으며, 그 해답은 학기가 끝난 후에야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그 과목의 학점은 결국 F학점으로 마무리 지어졌다. 왜냐하면 학기말 시험문제가 나의 관점으로서는 너무나 요상했기 때문이다.

<불교철학에 대해 아는 대로 논하시오!> 한마디로 6개월 동안 배운 바를 한 장으로 요약하라는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한 5분정도 생각하다가 단 한 글자로 요약하고는 아무것도 적지 않은 문제지를 제출하고 나오려니 교수님이 불렀다.

“학생, 이름은 적고 나가야지!”

나는 속으로 ‘공(空)이란 이름도 없고 글자도 없는 상태가 아닌가?’라고 중얼거리면서 이름은 적고 나왔다. 그렇지만 ‘이번 문제는 틀림없이 백점일 것이야.’라고 상상하니 입가에서는 절로 미소가 감돌았다.

그런데 그 과목의 점수는 결국 ‘0점’이었다. 교수님한테 나의 뜻을 전하면서 ‘0점’으로 처리한 사유를 물어보니 “그 해답은 자네가 원하는 해답이고 내가 원하는 해답은 아닐세.”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나는 선생님의 마음은 읽지 못하고 내 마음에만 도취되어 춤을 춘 것이었다.

우리가 엄지손가락을 다쳤을 때 아픔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그 아픔을 느끼는 그 놈은 어디에 있는 놈인가? 또한 검지를 다쳤을 때도 아픔을 느낄 것이다. 그러면 그 아픔을 느끼는 그 놈은 또한 어디에 있는 놈인가?

지구 위에서 지구를 바라다 볼 때는 편평하며 시(始)와 종(終)이 있어 보인다. 그렇지만 이 지구를 벗어나 우주선에서 지구를 바라다 볼 때는 다만 둥글 뿐이다. 마찬가지로 우물 안의 개구리와 같이 나(我相))라는 굴레에서 상대를 바라볼 때는 미움도 사랑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나라는 굴레를 벗어버리고 상대를 바라보게 되면 상대에게는 미움도 사랑도 없다. 다만 나의 마음이 미움을 만들기도 하며 사랑을 만들기도 한 것이었다.

선 위에서는 선형적 사고를 하기 때문에 출발점도 있고 종착점도 있다. 하지만 선에서 벗어나 있으면 원형적 사고를 하기 때문에 오직 원 하나만이 존재한다. 그곳에는 시작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러니 끝이 있을 리가 있겠는가. 다만 우리가 시작점이라고 이름을 붙였을 뿐이다.

이 세상을 선형적 사고로 바라볼 때는 매사가 경쟁적 대립관계로 보이게 된다. 그렇지만 원형적 사고로 바라볼 때는 의존적 보완관계임을 깨닫게 된다. 남녀의 관계가 경쟁적 대립의 관계일 수가 있겠는가. 엄지와 검지가 경쟁적 대립관계일 수는 없다. 피(彼)와 아(我)는 의존적 보완관계인 것이며 오직 한 몸체인 것이다.

선형적 사고는 육안(肉眼)으로 보는 부분적인 안목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원형적 사고는 심안(心眼)으로 보는 전체적인 안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부분에 집착하다가 보면 군맹평상(맹인이 코끼리를 손으로 더듬어 보고 코끼리를 평가함.)의 우(遇)를 저지르게 되며 이는 곧 갈등의 불씨가 되어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게 되며 마음의 상처는 자신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다.

그러나 전체를 보면서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매사에 임하게 될 때는 항상 즐겁고 행복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음(陰)을 보면서 양(陽)을 생각하는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단점도 보이고 미워하는 사람의 장점도 보이기 때문이다.

부분에 집착하지 말고 매사를 온전히 보고자 하는 생각을 가질 때 진정한 즐거움과 행복이 마음속으로 찾아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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