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길상사의 법회 때였다. 법회를 마치고 나면 내 속은 텅 빈다. 되는 소리 안 되는 소리 쏟아 놓고 나면 발가벗은 내 몰골이 조금은 초라하게 느껴진다. 이런 때는 혼자서 나무 아래 앉아있거나 흐르는 개울가에 앉아 개울물 소리를 듣고 싶다. 굳이 표현을 하자면 나는 홀로 있고 싶다.
남자 불자 한 분이 법회가 끝나자마자 내 뒤를 바짝 따라오더니 가사 장삼을 벗어 놓기가 바쁘게 가지고 온 책을 한 권 펼치면서 '좋은 말씀'을 한 마디 거기에 적어달라고 했다. 나는 방금 좋은 말이 될 것 같아 쏟아놓았는데 그에게는 별로 좋은 말이 못 된 것 같았다. 씁슬한 생각이 들었다.
화두 삼아 지닐테니 부득부득 써 달라고 햇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써 주었다. 그는 이 말이 성에 차지 않았는지 다시 좋은 말씀을 써 달라고 했다. 말귀를 못 알아듣는 이런 사람에게 더 할 말이 어디 있겠는가. 하는 수 없이 그의 요구대로 '좋은 말씀' 이라고 종이에 가득 찰 만큼 크게 써 주었다.
P. 174~1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