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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역사 일반글
신라 서라벌의 인구
입력 2009-10-06 오전 9: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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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는 신라의 전성기 때 수도에 17만 8936호가 있었다고 적고있습니다.
보통 1호를 5인으로 잡는데 이대로 17만 8936호를 계산하면 90만정도의 인구가 됩니다.

현재 울산광역시의 인구가 100만 정도임을 감안하면 천년 전 경주에 90만명이 살았다는것이 선뜻 믿기지 않을것입니다. 하지만 끝자리 수까지 세세하게 밝혀놓은 기록을 쉽게 무시할수도 없습니다.
신라시대에 과연 인구조사를 저렇게 철저하게 했겠냐는 의문이 들겠습니다.
 
 
그럼 어디 한번 일본 동대사 정창원에 소장된 신라 촌락 문서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이 문서에는 당시 인구가 연령별로 정확하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심지어 가축의 숫자까지 상세히 적어놨습니다.
이 시대에 이미 치밀한 인구조사가 실시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삼국사기에보면, 영흥사에 화재가 나 민가 350채가 한꺼번에 불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 주택 밀도가 매우 높았다는것을 알 수 있겠습니다. 신라에서는 신분에 따라 집의 크기를 제한하는 법령이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삼국사기 옥사조에 진골은 24척, 6두품은 21척, 5두품은 18척, 4두품 이하는 15척을 넘지 못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이는 택지 면적을 규제할만큼 인구가 증가했다는 뜻입니다.
 
집터 규모를 알 수 있는 동천동 지역을 근거로 당시 경주에 몇명정도가 살 수 있는지 추산해 볼 수 있습니다.
가로 14m, 세로 20m 집터에 집 3채가 있었으니 8000평 규모의 방(坊)에 150채 정도의 집이 들어설 수 있습니다.
360방으로 환산하면 약 5만 4000가구, 27만 정도의 인구가 살 수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당시 경주는 360방보다도 넓었습니다.
그것을 증명해주는것이 고분입니다. 왕릉이 생활공간 안에 있는것이 신라 수도의 특징입니다. 축조될 당시부터 이미 도시 범위에 속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6세기 이후 왕릉은 360방의 범위를 벗어나 외곽에 자리 잡게됩니다. 도시가 그만큼 외곽으로 확장된 것입니다.

경주에는 도시의 경계가 되는 나성이 없는 대신 수도 방비를 위해 쌓은 산성이 있습니다. 경주의 산성은 축조시기에 따라 3단계로 나뉩니다. 가장 바깥쪽의 산성들이 후대에 쌓은것입니다.
 
경주에서 동남쪽으로 21킬로미터쯤 가면 울산시와 경계가 되는 관문성이 나옵니다. 722년에 쌓은 이 성은 경주의 3단계 산성 가운데 하나로, 왜군을 차단하고 신라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통제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삼국유사는 신라가 이 관문성을 경주의 동남쪽 경계로 삼았다고 전합니다.
 
신라 경주는 360방을 훨씬 벗어난 지역까지 확장되었고 그 범위는 시, 군이 통합된 현재의 경주시와 거의 일치합니다.
이렇게 확대된 도시의 외곽지역에도 사람이 살았다는것을 경주 경마장 부지 발굴현장의 집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기둥구멍과 보조 아궁이, 무덤과 집터, 숯을 굽던 가마터 20기가 발굴되었는데 전국에서 발견된 가마터가 40기임을 감안하면 엄청난 수가 집중되어있는 것입니다.
이정도 된다면 기록에서 정확히 밝혀놓은 90만명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 다음 지식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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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놀랍다.. 서라벌의 인구가 100만이었다니 현재 울산정도 규모의 인구였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역사는 발전하는듯 보이지만 신라시대 사람들이 오히려 지금보다 더 행복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할때가 있다.
생산력과 생산수단의 비약적인 발전이 있기전에는 조선후기나 신라시대나 비슷한 수준의 삶의 질이 아니었을가 생각이 들때가 있다. 
 
바그다드, 장안, 콘스탄티노플과 함께  그당시 서라벌이 세계 4대 도시 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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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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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이면에는 당시 장보고(궁복)의 해상무역이 큰 역할이 되지않았을까 하네요^^*
신라의 해양술과 조선술이 일본과 당나라에서 파견을 요청 할만큼 발달되었다고
하는데,역시 현 시대의 우리들도 해양을 기반으로 뻗어나가야 할 필요성을 느낌니다.
좋은 정보 잘 봤습니다^^* [2009-10-06 오후 12: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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