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이후 조선보다 더 예민하게 『징비록』을 주목한 것은 일본이었다. 『징비록』은 1695년 일본에서 간행된다. 초판 『징비록』의 서문에서 가이바라 에키켄(貝原益軒)은 이렇게 썼다. “조선인이 나약하여 빨리 패하고 기왓장과 흙이 무너지듯 한 것은 평소 가르치지 않고 방어의 도를 잃었기 때문이다. (중략) 이것은 전쟁을 잊은 것이다.” 날카롭고 뼈아픈 지적이었다.
이윽고 1712년(숙종 38), 일본에 갔던 조선통신사 일행은 오사카의 거리에서 『징비록』이 판매되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고 경악한다. 보고를 받은 숙종과 신료들은 조선의 서책들이 일본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부산을 떤다. 가해자 일본이 피해자 조선보다 ‘징비의 정신’을 더 강조하는 서글픈 장면이 빚어졌던 것이다.
'조선은 왜군에 왜 짓밟혔나, 피로 쓴 반성문'중에서 (중앙일보,2015.2.14)
류성룡이 쓴 『징비록(懲毖錄)』... 징(懲)은 징계하다, 벌주다의 뜻이고, 비(毖)는 삼가다, 경계하다, 조심하다, 근신하다의 뜻이지요. 『시경』의 문구에서 따온 것으로, 임진왜란 당시의 문제점과 실책을 벌주어 그런 재앙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한다는 의미를 담은 책 제목입니다. 류성룡이 영의정으로 7년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느낀 회한과 반성을 기록한 책입니다. 승리했던 것보다 패했던 내용을 상세히 적었고, 일본군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담았습니다.
그런데 류성룡이 『징비록』을 남겼지만, 조선은 이 책에서 전혀 배우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놀라운 것은 일본의 모습입니다.
조선에서 『징비록』이 간행된 건 1633년. 그런데 불과 62년 뒤인 1695년에 이 책이 일본에서 출간됐습니다. 당시의 출판환경에서는 대단한 일입니다. 1712년 조선통신사 일행이 일본에 갔다가 거리에서 『징비록』이 판매되고 있는 것을 보고 경악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정작 조선은 1592년의 임진왜란에서 전혀 교훈을 얻지 못하고 개혁에 나서지 않고 있다가 30여년 뒤인 1636년에 병자호란이라는 치욕을 또다시 겪었지만, 오히려 일본은 『징비록』을 출간하며 조선을 연구하고 '징비의 정신'을 새기고 있었던 겁니다.
류성룡을 다룬 드라마가 시작되면서 요즘 『징비록』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징비록』이 조선에서 나오자 신속히 번역해 출간하며 조선을 연구했던 일본. 책이나 드라마를 보며 이런 일본이 지금도 우리 옆에 존재하고 있다는 걸 기억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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