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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만리(崔萬理, 1388년(?) ~ 1445년 10월 23일)는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 정치인, 유학자이자 철학자, 법학자이다. 본관은 해주. 조선 전기의 명신으로 청백리로 녹선되었으나,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할 때 반대하였다고 알려진 유학자이다. 오랫동안 집현전에 몸을 담고 고제(古制) 연구 및 적용에 주력했으며 한글 창제에 대한 반대상소를 올렸다.
생원시에 합격한 뒤 1419년(세종 1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으며, 홍문관과 집현전에서 오래 근무하였다. 1427년에는 다시 중시문과(重試文科)에 급제하였다. 그 뒤 집현전 부제학, 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해주 최씨의 시조인 해동공자 최충(崔沖)의 12대 후손이고, 최자(崔滋)의 6대 손이며 최하(崔荷)의 아들이다. 자(字)는 자명(子明), 호는 강호산인(江湖散人)이다. 《세종실록》 1444년 2월 20일 합소(연명 상소)에서 한글 창제를 반대한 여러 대신 중 대표적 인물이며, 지나친 반발로 세종의 노여움을 사 의금부에 갇히기도 하였다. [2]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최경회(崔慶會)의 5대 방조이며, 조선 중기의 대학자 율곡 이이(李珥)의 증외고조부가 된다. 시호는 공혜(恭惠)이다.
초기 활동[편집]
아버지는 최충의 후손 최하(崔荷)이다. 해동공자로 문헌공도와 사학12도를 세운 최충(崔冲)의 12대손이며 고려 중기의 저명한 문인으로 보한집(補閑集)의 저자인 최자(崔滋)의 6대손이다. 일찍이 불의와 타협을 거부하는 대쪽같은 성품을 지녔으며, 생원시에 입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증조부는 최공(崔珙), 조부는 최안해(崔安海)이고 아버지 최하(崔荷)는 예빈시윤을 역임하고 사후 증직으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충주지씨로 문하시랑을 지낸 지용수(池龍壽)의 딸이다. 중화양씨 판관 양미(楊美)의 딸과 결혼하여 아들 다섯 형제를 두었고, 딸 1명은 덕수이씨 이의석에게 출가하였다. 다섯째 아들 최연은 집현전 전한을 지냈는데 그는 후일 삼당시인의 한사람인 최경창의 고조부이자, 조선후기에 영의정을 지낸 최규서의 9대조가 된다.
할아버지 최안해의 동생은 최안택인데 그는 의병장 최경회(崔慶會)의 7대조가 된다.
정치, 학문 활동[편집]
관료 생활과 학문 연구[편집]
1419년(세종 1년) 생원으로 증광문과(增廣文科) 을과에 급제하였다. 그해 홍문관에 보임되었고, 이듬해 집현전이 설치되자 정7품 집현전 박사를 거쳤고 1427년 교리(校理)가 되었다. 교리 재직 중,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여 당상관으로 승진하였고, 응교·직제학·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1427년(세종 9)에 교리로서 문과 중시(重試)에 급제하여 응교에 올랐으며 같은 해 7월에 세자(훗날의 문종)가 조현(朝見)할 때 서장관겸검찰관(書狀官兼檢察官)이 되어 직제학 정인지(鄭麟趾)와 집의 김종과 함께 세자의 사부가 되어 주강(晝講)을 담당하였다. 이어 집현전 응교가 되어 우문학(右文學)을 겸하였으며, 좌필선(左弼善) 정인지(鄭麟趾)와 함께 번갈아 가며 세자에게 고금의 고사성어와 훌륭한 정치를 강론하였다.
집현전 관리로 세자의 서연을 담당하였으며, 그 뒤로 오랫동안 집현전에 몸을 담고 고제도(古制度) 연구에 몰두하여, 고제도의 해석과 번역, 적용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 중 오례(五禮)·시정(施政) 등 고제도의 연구와 해석에 심혈을 기울였고, 《자치통감훈의 資治通鑑訓議》·《정관정요주 貞觀政要註》 등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436년(세종 18) 4월에 집현전 직제학 최만리를 초시의 대독관(代讀官)이 되어 시험을 주관하였으며 1437년 집현전 직제학이 되었고, 1439년에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이듬해 다시 집현전에 돌아와 부제학이 되었다.
불교 배척과 유교이념 적용[편집]
1438년 7월 부제학이 되고 1439년 6월 외직인 강원도관찰사로 나갔다가 1440년 7월 다시 집현전부제학으로 복귀하였다. 집현전의 부제학으로서 14차에 걸쳐 상소를 올렸다. 그 중 불교배척 상소가 6회, 첨사원(詹事院) 설치 반대상소가 3회로서 그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밖에 일본과의 교역에서 석류황(石硫黃)의 대가를 지나치게 후하게 지불한 것에 대한 책임추궁, 진사시에서 시(詩)의 출제법이 잘못됨을 지적한 것, 그리고 이적(李迹)의 사형 결정이 모호하다고 감형을 주장하기도 했다.
집현전 부제학으로 재직 중 세종대왕이 연이어 가족을 잃고 불교에 관심을 보이자, 그는 조선의 건국 이념이 유교임을 들어 불교에 대한 왕실의 호의를 비판하였다. 이어 왕실의 지원을 받은 흥천사(興天寺)의 사리각 중수에 반대하였고, 경찬회(慶讚會) 혁파와 불교 배척 상소롤 올렸고, 첨사원(詹事院) 설치 반대상소 등 14차례의 상소를 올려 불교의 배척과 유교사상을 수호하였으며, 유학 사상을 엄격하게 적용하려 했다.
집현전 학사와 훈민정음[편집]
1443년 12월 세종의 왕명으로 최항(崔恒)·정인지·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 등의 집현전 소장학자들이 훈민정음을 연구하고 운회(韻會)의 번역으로 한자음을 개혁하려 하자, 그는 이를 반대하였다.
처음에 최만리는 한자를 버려서는안 된다고 하면서 이두(吏讀)를 더 발전시키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고 했다.[3] 이것은 집현전 학자들 내에서도 상반되는 의견 대립을 조성했다. 젊은 학자들은 뭣때문에 우리의 글을 만드는 데 한자를 이용하겠는가 라며 최만리의 견해에 반기를 들었다.[3]
1444년 2월 최만리는 신석조(辛碩祖), 김문(金汶), 하위지, 정창손(鄭昌孫) 등 집현전 내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하는 학자들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반대상소를 올렸다.
이때 연명 상소를 올린 학자들은 이 상소에서 중국과 다른 문자를 만드는 것은 사대모화(事大慕華)에 어긋나며, 스스로 이적(夷狄)이 되려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점, 이두(吏讀)는 한자를 배우는 데 도움이 되지만 언문(諺文)은 그렇지 못해 유익함이 없다는 점, 널리 의견을 묻지 않고 갑자기 이배(吏輩) 10여 명에게 언문을 가르쳐 고인이 이미 이룬 운서를 고쳐 인쇄하려는 것은 신중하지 못하다는 점, 동궁(東宮)이 언문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점 등 반대의 이유 6가지를 제시했다.
최만리는 이때 상소를 올린 집현전학자들의 대표격이었는데, 이에 세종의 노여움을 사 책망받은 뒤, 친국을 당하기도 했다. 다음날 석방되었으나 사직하고 낙향했다.
기타 상소[편집]
그밖에 일본과의 교역에서 규정을 위반하면서까지 일본에게 석류황(石硫黃)의 대가를 지나치게 후하게 지급해준 것에 대한 책임 추궁 상소, 진사시험 출제에서 시(詩)의 출제법이 잘못됨을 지적한 것, 그리고 이적(李迹)의 사형 결정이 모호하다며 사형의 남용에 반대하여 감형을 주장하는 등의 상소를 올려, 이를 시정하게 하였다.
생애 후반[편집]
1444년 사직하고 고향으로 낙향하였다. 노년에는 통정대부에까지 올랐으며, 청백리로 기록되었다. 1445년 10월 23일에 사망하니 향년 58세였다. 시호는 공혜(恭惠)인데 ‘공(恭)’은 공경하여 순하게 위를 섬기는 것, ‘혜(惠)’는 너그럽고 넉넉하고 자애롭고 어진 것을 의미한다.
사후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지문리 산3(현 안성시 원곡면 지문리)에 안장되었고, 부인 중화양씨와 합장되었다. 묘소 근처에는 아버지 최하와 어머니 지씨 내외, 둘째아들 예조좌랑 최정(崔埥)과 며느리 여흥이씨 내외의 묘소 등이 있고, 사당인 강호재가 세워졌다. 신도비는 1962년 이숭녕(李崇寧)이 짓고, 후손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딸 최씨를 통해 율곡 이이의 증외고조부가 된다. 딸은 대제학인 윤회의 외손자인 덕수 이씨 이의석(李宜碩)에게 시집갔는데 최만리의 외손자는 이천이며 진외증손은 율곡 이이의 아버지인 이원수이다.
그는 훈민정음 창제 당시 집현전 학사들 중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하는 입장의 대표자의 입장에 섰다. 이때 최만리와 함께 훈민정음을 반대하는 입장에 선 집현전 학사들은 정창손, 하위지 등이었다. 그러나 세종대왕을 지나치게 미화하는 과정에서 그를 훈민정음 창제를 방해한 인물로 왜곡되어 논란의 대상이 되어 왔다.
조선 멸망 이후 최만리에 대한 재평가 여론이 나타났다가, 1960년대 박정희 정권에서는 세종대왕을 지나치게 미화하는 과정에서 다시 수그러들었다. 후에 1990년대 이후 최만리에게 가해진 한글창제 반대의 원흉인 것처럼 조작된 이미지를 벗기기 위한 재평가, 재조명 노력이 나타나고 있다.
한글 창제 반대 상소문[편집]
1444년 2월 최만리는 신석조(辛碩祖), 김문(金汶), 하위지(河緯地), 정창손(鄭昌孫) 등 집현전 내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하는 학자들과 함께 한글 창제 반대 상소문을 올렸다. 이들이 훈민정음을 반대한 이유는 당시 시대상황상 문자를 읽을수있는건 집권층이었던 양반계급층뿐이었고 중국의 문자인 한자는 당시 일반 백성에게는 막대한 교육비때문에 도저히 배울수가 없었기에 이와동시에 중국의 문자로 쓴 법전은 백성들에게는 법에대한 자세한 내용을 읽을수가 없었기에 최만리 같은 양반입장에서는 한자야 말로 기득권이라고 생각했었고 더욱이 최만리는 지금으로 치면 엘리트주의인 학자였기 때문에 양반보다 계급이 낮은 백성들이 법에대해서 알게되면 그걸 악용할것이고 그러면 국가의 기반이 흔들릴것이라고 생각해서 반대하였다. 그리고 당시 조선의 양반중에 최만리와 같이 명나라문화를 최고라고 여겼고 한글이 창조가 되었을때 오랑캐의 문자라고 비하하였을정도이다. 덧붙여서 최만리는 조선만의 문자 즉 한글을 창제한다는것은 명나라를 자극하여 전쟁이 벌어질수있다고 판단하였다 그 이유는 한글창제 전에는 주변국들은 상위 계급층들은 한자를 쓰면서 중국문화권에 속하였고 이는 속국이라고 볼수있었다. 각 국가마다의 문자를 창제한다는 것은 거의 중국에 대한 독립선언문과 같았기에 중국이 분명 이를막기위해 전쟁이 벌어질수있었기 때문이다.)
저서 및 작품[편집]
- 《자치통감훈의 資治通鑑訓議》
- 《정관정요주 貞觀政要註》
가족 관계[편집]
최만리는 딸 최씨를 통해 율곡 이이의 증외고조부가 된다.
- 할아버지 : 최안해
- 아버지 : 최하(崔荷)
- 어머니 : 충주 지씨
- 부인 : 중화 양씨
- 장인 : 양미(楊美)
- 외할아버지 : 지용수(池龍壽)
- 사돈 : 윤회
평가와 비판[편집]
긍정적 평가[편집]
20년 이상을 집현전에서 근무하며 고제도의 해석과 적용에 기여하였다. 대쪽 같은 선비로 인정받았으며, 청백리로도 이름이 높았다. 부정과 타협을 모르는 깨끗한 관원으로서 일관하였으며 진퇴가 뚜렷하였다[5]는 평가도 있다.
부정적 평가[편집]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하는 집현전 학사들의 대표격인 인물로 활동한 점이 부정적으로 평가되었다. 이는 세종대왕의 미화와 함께 두드러지게 나타나 논란의 여지가 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서울특별시 중구의 만리동(萬里洞)은 과거 최만리가 살던 곳이라서, 그의 이름에서 따서 만리동이라는 지명(地名)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