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대개 우리에게 실망을 주지만, 외면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존재'인 것이지요. 정치가 경제, 사회, 문화 등 인간의 모든 부분에 직접적이고 강력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좀처럼 '바뀌지 않는 정치'에 대해 고민하다, 올해 '정치의 미래'에 대해 책으로 정리해보았습니다. 인터넷이 바꾸고 있는 정치의 미래를 알아보기 위해 '정치의 원형'과 오래전의 사상가들과 그들의 철학도 살펴보았지요.
아래는 제가 쓴 <정치의 미래와 인터넷 소셜의지>(21세기북스,2014)의 4장 '정치의 철학과 공동체의 미래' 중 2절인 '아리스토텔레스: 집단지성, 효율성만이 아닌 공존과 책임의 정치'의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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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정치의 철학과 공동체의 미래'
2절 '아리스토텔레스: 집단지성, 효율성만이 아닌 공존과 책임의 정치'
(104쪽)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주의에 대해 인류 최초로 이론적인 분석을 남긴 철학자이다. 정치철학을 공부할 때 우리는 그 출발점으로 플라톤의 『공화국』과 함께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과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만난다.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는 마케도니아의 왕 아뮌타스 2세의 궁정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17세 때 그리스 아테네로 와 플라톤의 제자가 됐다. 41세 때는 마케도니아의 왕 필립포스 2세에게 초빙되어 왕자(훗날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교육을 맡았다. 기원전 336년에 다시 아테네로 돌아와 리케이온에 학원을 열고 연구와 강의활동을 했다.
그가 그리스 폴리스 공동체의 황금기가 저물던 시대를 살아가며 쓴 『정치학』을 보면 현대를 사는 우리가 고민하는 정치의 거의 모든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정치의 미래와 관련,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우선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다수자는 비록 그중 한 명 한 명은 훌륭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함께 모였을 때는 개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전체로서 소수자인 가장 훌륭한 사람들보다 더 훌륭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마치 여러 사람이 비용을 갹출한 잔치가 한 사람의 비용으로 제공되는 잔치보다 더 나은 것과 같다. 그들은 다수고, 각자는 나름대로 탁월함과 지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 이 사람은 이 부분을, 저 사람은 저 부분을 이해함으로써 모두를 합치면 전체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웹2.0, 웹 스퀘어드(제곱)의 시대정신인 집단지성을 아리스토텔레스가 2,000여 년 전에 이미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대중 개개인은 전문가들보다 못한 판단을 내릴지 몰라도 집단으로서는 더 나은 또는 못지않은 판단을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 또 건물에 대한 판단은 건축자보다 그 건물의 사용자가 더 훌륭하게 내릴 수 있고, 요리에 대해서는 요리사보다 손님이 더 훌륭하게 판단한다는 말도 했다.
따라서 정치에 대해서도 정치인보다는 정치의 고객인 국민이 더 훌륭하게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맞을 것이다. 소수 엘리트나 전문가의 지혜보다 ‘대중의 지혜the wisdom of crowds’가 공동체 정치에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의미다. 특정인 또는 소수 집단의 훌륭함에 기대었다가 그들의 변덕에 휘둘리기보다, 전체로서의 대중의 판단에 따르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이다. 이는 그의 스승인 플라톤이 판단의 기초a basis for judgment로서의 ‘대중의 지혜의 타당성the validity of mass wisdom’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던 것과는 매우 다른 입장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집단의 판단은 현명하기 때문에, 최고권력은 소수가 아니라 대중 전체가 갖는 것이 정당하고 또한 좋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우리는 스마트 소셜 시대, 웹2.0 시대의 집단지성의 단초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제임스 서로위키의 『대중의 지혜』, 크리스 앤더슨의 『롱테일 경제학』, 돈 탭스코트의 『위키노믹스』 등에서 볼 수 있는 집단지성의 고대 아테네 버전인 셈이다.
사실 현실적으로는 고대 아테네에서처럼 인간의 ‘말’을 통한 집단지성의 실현은 쉬운 일은 아니다.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의 규모도 작을 수밖에 없고, 사람들의 수많은 연설들에서 집단지성의 결론을 추출해내는 것도 간단치 않기 때문이다.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스마트 소셜과 빅 데이터가 플랫폼이 되는 정치의 미래에서는 이런 어려움은 해소될 수 있다. 인간의 말이 아니라 ‘데이터’를 통한 집단지성이 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의 미래와 관련해 우리는 또 아리스토텔레스의 ‘공존과 책임의 정치’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은 한 마디로 ‘혼합정’으로 표현할 수 있다. 우리는 앞에서 고대 아테네에 잠시 모습을 보였던 정치의 원형을 살펴보았다. 그건 자신의 힘으로 무장해 발언권을 확보한 개인들, 즉 광범위한 중산층의 출현과 함께 나타났다가 권력이 하층시민에 과도하게 쏠리는 민주정의 급진화로 아테네가 민중제국주의로 치달으면서 사라져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의 쇠락을 경험하면서 그것이 특정 계층의 권력 독점 때문이었다고 보고 계층 간의 공존과 균형을 통한 공화, 즉 혼합정체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솔론과 클레이스테네스의 아테네 황금기를 떠올렸다. 계층 간의 균형에 의해 지배가 없는 상태, 즉 부자와 빈자, 왕이나 귀족, 중산층, 하층 중 어느 한 집단도 자신의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 정치를 지배하지 않는 혼합정체를 제시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다수자가 공동의 이익을 위하여 통치할 경우, 정부는 모든 정체에 공통된 명칭인 ‘정체’ 또는 ‘혼합정체’라고 불린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왕정이 왜곡된 것이 참주정체, 귀족정체가 왜곡된 것이 과두정체, 혼합정체가 왜곡된 것이 민주정체다. 참주정체는 독재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1인 지배 정체고, 과두정체는 부자들의 이익을 추구하며, 민주정체는 빈민의 이익을 추구하고, 그 어느 정체도 시민 전체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정체 구분이다. 시민 전체의 이익, 즉 공익을 추구하는 정체를 왕정(1인 지배), 귀족정체(소수 지배), 혼합정체(다수 지배)로 나눴고, 공동체 전체의 이익이 아닌 사익이나 특정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는 정체를 참주정체(1인 지배), 과두정체(소수 지배), 민주정체(다수 지배)로 분류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현실에서 가장 바람직한 정체로 본 것은 이 중 ‘다수자가 공동의 이익을 위해 통치’하는 혼합정체였다. 우리는 표현상의 오해를 피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구분 중 나쁜 의미의 민주정을 ‘폭민정’으로(폴리비오스가 그렇게 분류했다), 그리고 좋은 의미인 혼합정체를 ‘민주공화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어쨌든 혼란에 빠진 폴리스의 현실을 보며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수가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공존과 책임의 혼합정체를 최선의 정체로 제시했다. 그는 『정치학』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체는 더 잘 혼합될수록 그만큼 오래 존속된다. 귀족정체를 구성하려는 사람들도 흔히 실수를 하는데, 부자들에게 너무 많은 권력을 줄 뿐만 아니라 민중을 기만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허울뿐인 혜택으로부터는 시간이 지나면 언젠가는 진정한 재앙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부자들의 탐욕은 민중의 탐욕보다 정체에 더 파괴적이기 때문이다.”
공존의 정치, 특정 집단이 공동체를 좌지우지하지 못하는 정치는 얼핏 보면 효율성이 떨어지는 정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효율성만을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일’인 정치와는 맞지 않는다. 오히려 부작용만 커질 수 있다. 인간의 본성이 100% 효율적이고 이성적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비효율적이고 비이성적인 부분이 있으며, 그것을 포함한 전체가 인간의 실제 모습이다. 효율성만이 아닌 공존과 책임의 정치는 우리가 뒤에서 살펴볼 정치의 미래, 스마트 소셜 정치의 모습과 맞닿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