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4년은 화가 이중섭에게 최고의 해였다. 그림으로 시작한 한 해가 그림으로 저물어간 해였기 때문이다. 통영에서, 마산에서, 진주에서 그리고 서울에서 끝없이 그리고 또 그렸다. 이중섭은 상경 직후 인왕산 기슭 누하동, 11월1일부터 노고산 기슭 신수동에서 생활했는데 어느 곳에서건 창작열을 불태웠다.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는 말할 것도 없지만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끝없이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이중섭은 통영, 진주에서와 마찬가지로 서울에서도 개인전을 앞두고 정진의 시절을 보내고 있었는데 탐닉하는 화가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자화상이었다. (530쪽)
"아침엔 꼭두새벽부터 일어나서 제작하고 있소. 하루 종일 세수를 안 하는 날도 있다오. (서울은 조석으로 추워서 몸이 떨릴 정도요.) 낮에도 졸리면 그대로 자버린다오. 너무 자서 저녁때 잠이 깨면 또 그대로 제작을 계속하고요."
"어떤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소처럼 무거운 걸음을 옮기면서 안간힘을 다해 제작을 계속하고 있소."
"아빠도 팬티까지 벗어던지고 일에 열중하고 있소. 아침저녁 언제나 집 뒤의 바위산, 풀덤불 있는 맑은 물에 몸을 씻고 마음을 밝고 강하게 하고 있소. 어제 저녁엔 9시경에 하도 달이 밝기에 몸을 씻고 바위산 마루에 혼자 올라가 - 밝은 달을 향해 - 당신과 아이들에 대한 끝없는 애정과 훌륭한 표현을 다짐했소."
천재, 비련, 요절 등의 이미지와 대표작 '흰 소'로 잘 알려진 화가 이중섭. 그가 1954년 일본에 있는 부인에게 쓴 편지들의 내용입니다. 그는 생활비와 부인과 두 아들이 있는 일본으로 건너갈 여비 마련을 위해 1955년 1월 서울 미도파화랑에서 '이중섭 작품전'을 열었습니다. 편지를 보면 개인전을 준비하면서 1954년에 열정적으로 그림 그리기에 몰두했던 이중섭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미도파화랑에서의 작품전 이후의 일은 잘 알려진 대로입니다. '대가(代價)를 울궈내야 한다'고 생각했던 소품전은 호평을 받았지만 팔린 그림들의 값은 제대로 받지 못했습니다. 실의에 빠져 정신이상과 영양실조 등으로 고통을 겪다가 불과 1년 후인 1956년 9월 서울 서대문 적십자병원에서 '무연고자'로 마흔한 살의 나이에 쓸쓸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기록'들로 가득 채운, 900쪽이 넘는 '이중섭 평전'에서 저자 최열은 이중섭이 나고 자란 고향 평안도의 민요 '수심가'(愁心歌) 한구절을 소개해 놓았더군요.
獨行千里 一生一去(독행천리 일생일거).
홀로 걸어 천리 길, 한 번 나고 한 번 가네...
이중섭이 한 말도 있습니다.
"예술은 진실의 힘이 비바람을 이긴 기록이다."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이었던 1954년, 그림 그리기에 정진했던 인간 이중섭을 떠올리며 누구에게나 해당될 '독행천리 일생일거'와 '비바람'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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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6년부터 9년째 매년 연말에 열리고 있는 국내 최고의 인터넷 분야 컨퍼런스인 '웹월드 컨퍼런스'가 올해에도 11월18일(화)~21일(금) 서울 강남역앞 과기회관 대회의장에서 개최됩니다.
-18일(화):인터넷 서비스
-19일(수):웹디자인
-20일(목):인터넷 마케팅
-21일(금):웹개발.
인터넷 비즈니스를 공부하고 싶어도 등록비 부담 때문에 고민하는 대학생 경제노트 가족을 위해 올해에도 행사 진행을 도우면서 컨퍼런스를 무료로 수강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습니다. 대학생 경제노트 가족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대상 : 대학생 경제노트 가족 (최근 졸업을 하고 취업준비중인 분도 가능)
-내용 : 컨퍼런스 진행요원으로 자원봉사를 하면서 강연 시간 중에는 교육을 수강.
-지원방법 : 지원사유와 지원 날짜, 휴대폰 번호를 적어 이력서와 함께 이메일(help@plutomedia.co.kr)로 송부.
-선발방법 : 지원사유를 검토해 가장 적합한 학생을 선발. 4일 모두 자원봉사할 수 있는 학생은 우선 선발. 선발된 학생에 대해 11월10일(월)까지 개별 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