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번역가인 천병희(80) 단국대 명예교수의 서울 송파구 아파트 거실과 안방에는 클래식 음반들이 작곡가와 장르, 음반사와 연주자별로 가지런히 분류돼 있다. 거실엔 푸치니의 오페라, 바흐의 칸타타와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들이 있고, 안방에는 베토벤·브람스의 작품들이 꽂혀 있는 식이다.
작업실로 쓰는 서재 역시 마찬가지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영어·독일어 서적들이 벽 하나를 가득 채우고 있다. 컴퓨터 곁에는 항시라도 볼 수 있도록 사전들이 놓여 있다. 천 교수는 "이렇게 정리해두지 않으면 나중에는 책들이 섞여서 찾느라 시간을 다 보내게 된다"고 했다. 어쩌면 정리벽(整理癖)이야말로 그가 40여 년간 50여 권의 책을 꾸준히 번역할 수 있었던 원동력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성현의 '스무살에 처음 읽은 플라톤, 여든에도 여전히 그는 내 스승' 중에서(조선일보,2019.5.11)
천병희 단국대 명예교수. 올해 80세인 그가 최근 플라톤의 전집을 7권으로 완역(完譯)해냈습니다.
경제노트에서도 몇 번 소개해드렸던 분이지요. 많은 이들에게 그리스 고전을 그리스어 번역본으로 읽을 수 있게 해준, 고맙고 또 대단한 분입니다.
천교수는 2012년 '소크라테스의 변론', '향연', '파이돈' 등을 묶어 첫 권을 번역해 출판했습니다. 그 후 7년에 걸쳐 '플라톤전집 Ⅱ', '국가', '플라톤의 다섯 대화편', '법률', '뤼시스/라케스/카르미데스', '플라톤 신화집', '플라톤전집 Ⅶ'을 완역한 겁니다.
그는 플라톤의 저술들만 그리스어본으로 번역해준 게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니코마코스 윤리학' '수사학' '시학',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오뒷세이아', 헤로도토스의 '역사', 투퀴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이솝의 '이솦우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등 무수히 많은 고전들을 번역해주었습니다.
1956년 서울대 독문학과에 입학한 후 첫 겨울방학 때 고향에 내려가 초급 그리스어 공부를 시작한 것이 그의 고전 번역의 시작이었습니다. 플라톤 전집 완역에 대해 그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더군요.
"처음부터 전집을 염두에 둔 건 아니었다. 틈날 적마다 한 권씩 번역한다는 생각이었는데 분량이나 비중 모두 만만치 않은 '법률'(2016년)을 마치고 나니 완역에 대한 욕심이 은근히 생겼다."
번역은 저술만큼, 아니 고전의 그리스어 번역 등 몇몇의 경우에는 저술보다 훨씬 더 힘든 작업입니다. 빛도 덜 나지요.
제 책장에도 그가 번역해준 고전들이 여러 권 있습니다. 꺼내 볼 때마다 '제대로' 읽을 수 있게 해준 천교수의 '노고'에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우리나라에도 천교수처럼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기본'을 쌓아주는 분들이 더 많아져야 진정한 선진국이 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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