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소 놀이는 혼자 하지 못한다. 둘이나 그 이상의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받침대로부터의 거리와 올라앉는 사람의 무게에 따라 평형이 좌우된다. 만약 몸무게가 차이 나면 몸이 무거운 사람이 널빤지의 중심축 방향으로 다가오든지 아니면 가벼운 쪽에 사람이 더 앉아야 한다. 그래서 타인에 대한 배려를 전제로 하는 놀이이며, 승부가 없는 놀이다. 특히 협동심을 기르는 데 적합한 놀이인 탓에 대부분의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설치돼 있다.
그런데 중학교에 들어서면서 시소는 운동장에서 사라진다. 고등학교, 대학교에서는 시소를 찾아볼 수 없다. 만약 그곳에 시소가 있다면 예술품이거나 학습용 도구일 것이다. 왜 자라나면서 시소 놀이는 우리에게서 멀어지는 것일까? 왜 학년이 올라갈수록 시소에 앉는 일이 줄어들까? 누구도 그 이유를 알려고 하지도 않고 알려주지도 않는다. 분명한 건 갈수록 이김과 짐이 분명한 게임을 즐긴다는 것이다. 학교에서는 등수로, 입시에서는 당락으로, 회사에서는 승진 경쟁으로, 사회에서는 빈부 경쟁으로 갈린다. 그 결과 세계 15위 경제대국이라는 이면에는 ‘최저생계비 이하로 살아가는 절대 빈곤율 7.6%, 중위소득의 절반이 안 되는 수입으로 생활하는 상대 빈곤율 14%, 근로자 3명 중 1명은 비정규직’이라는 어둠이 있다.
한국의 노년은 더욱 슬프다. 65세 이상이 되면 2명 중 1명은 상대적 빈곤 ‘절망’에 빠져야 한다.
어쩌면 글로벌
비즈니스 경쟁이니 하는 격렬한 삶 속에서 배려보다는 승부욕이 더 필요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경쟁원리의 밑바탕 속에서
성장을 이룩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논란에 있는 복지 논쟁을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해답을 찾기 어렵다. 시소의 받침대를 이동해 무게 중심을 맞추기에는 양 축의 격차가 너무 심하다. 다시 말해 사회
시스템으로 해결하기에는 양 계층의 의견이 너무 팽팽하다. 이제 시소의 중심 받침을 옮기기 전에 양축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살펴야 한다.
문화일보 2014년 11월 19일 37면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