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친(親親)이란 마땅히 친해야할 사람과 친함을 일컫는 말이다. 아이들은 형제, 부모와 친해져야하고, 학생은 학급친구, 스승 그리고 학교와 친해져야하고, 직장인은 동료, 선후배 그리고 회사와 친해져야하고,
군인은 전우와 부대 그리고 국가와 친해져야한다. 경제인, 정치인들은 국민과 친해져야한다. 그런데 당연히 친해져야하는 대상들과 친하게 지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가출하는 가족들, 폭행이 난무하는 가정들, 학교 친구들에 따돌림 당하여 자살하는 아이들, 학생의 뺨을 사정없이 내리치는 몰염치한 선생과 경찰서에 스승을 신고하는 해괴한 학교
풍경, 자신의 이기심에 동료를 낭떠러지로 내몰고 회사의 기밀을 기꺼이 경쟁사에 넘기는 회사원들, 적에게 향해야할 총구를 전우에게 마구 난사하는 얼빠진 병사와
수조원의 국방예산을 연기로 사라지게 한 뇌물 꿀꺽 장성과 장교들. 날이 갈수록 두툼해지는 자신의 속주머니를 보면서도 형평성보다 효율성만을 강조하는 자본가들, 선거철이면 자신의 간까지 내놓을 듯 망설임 없던 위정자들의 함박웃음은 정치마당에 들어서면 얇은
비소(誹笑)로 국민들의 목소리에 답변한다.
왜 우리 사회는 날이 갈수록 팍팍해지는 걸까? 그 원인 중 하나는 열흘을 굶은 사람과 삼시 세 끼를 꼬박 챙겨먹는 사람의 도덕성을 동일하게 보려는데 있다. 다시 말해 경제적 여건이 불안정하면 도덕성을 실천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주변을 돌아보자. 사회전반에 절대적 가난과 상대적 결핍이 점점 깊게 번져나가면서 어버이가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이 어버이를 섬기는 근본적인 도리마저 무너지고 있다. 이처럼 가장 가까운 것을 소중히 하고 사랑하는 친(親)을 이루기 힘든 현실에서 인도철학자 사카르의 프라우트(PROUT: Progressive Utilzation Theory, 진보적 활용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프라우트 이론은 모든 사람이 삶을 영유함에 있어 음식, 의복,
보금자리, 교육 그리고 의료 등 최소한 필요한 것이 보장되고, 부의 집중을 견제하는 경제학이다. 쉽게 이야기하면 부와 소득의 상한선을 설정하고, 최저수준을 끊임없이 상향조정하여 사회구성원 간 분배의 차이를 점점 줄여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매년 최저임금제에 대한 합의는 하지만 최고임금제의 상한선에 대한 논의는 하지 않는다. 재능과 능력 그리고 사회 기여도가 큰 사람들에게 높은 임금이나 과실을 주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 사회 최하계층과 최상계층간의 수십 만 배의 빈부격차가 가져오는 부작용 또한 되돌아 보아야한다.
이를 해결하고자 프라우트 경제체제는 산업구조 재조정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고용을 최우선 정책과제로 삼는다. 그리고 생산의 목적은 자본축적을 위한 이윤극대화가 아니라 소비수요 충족을 위해 이루어져야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소비충족은 2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지는데, 먼저 주로 상업과 소규모단위 서비스사업은 개인이나
개인사업자의 사업을 통해 이루어지는데 이는 각 개인들의 생산성이나 창의성을 보장한다. 대단위 사업이나 소규모 개인 사업이 일정 규모 이상으로 커지면 협동조합화 하는데, 협동조합은 주로 대규모 소비재 산업, 경공업, 대규모
농업을 담당하고, 해당 지역주민들이 직접
경영과 노동에 참여한다. 그리고 경제체제의 밑바탕을 지지해주는 규모가 큰 기간산업은 국가 관할 하에 둔다. 예를 들면, 동력자원, 중화학, 교통
통신, 국방 등 다른 영역의 기초가 되는 가장 중요한 부문들이다.
이처럼 프라우트 경제체제는 세상의 모든 자원을 합리적으로 분배하고 최대한으로 활용한다. 그리고 협동조합을 그 중심에 두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친해야할 사람과 친해지는 친친(親親)을 가능하게 한다. 가족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이웃과 친구, 제자와 스승, 동료와 선후배, 전우와 상사 나아가 국민을 사랑할 수 있다. 무너져가는 가장 작은 경제단위 '가족'의 도덕성을 부활시키고 강화시키는 프라우트 경제체제의 중심인 협동조합과 친친해야할 때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