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사각지대, 협동조합으로 톺아보자
'톺아보기'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샅샅이 더듬어 뒤지면서 찾아보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생소한 단어지만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용어이다. 왜냐하면 현대인은 너무 바쁘게 살아간다는 이유로 사회에서 발생하는 일이나 사건들을 건성건성 혹은 대충대충 얼버무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어느 곳을 톺아보아야 할까? 보이지 않는 부분, 감추어진 부분을 보아야 한다. 바로 세상의 사각지대이다.
사각지대란 어느 위치에 섬으로써 사물이 눈으로 보이지 아니하게 되는 각도를 말한다. 단적으로 표현하면 한 손에 돈뭉치를, 다른 한 손에 야구방망이를 든 자본가는 자신의 발아래 꿇어앉은 노동자의 가슴앓이를 보지 못하는 경우이다. 아니 보려하지 않는 태도이다. 세상의 사각지대는 번쩍이는 양복에 누런 휘장이나 배지를 다는 순간 더 이상 사회적 약자의 가슴을 읽지 못하고 읽지 않으려는 위정자나 권력가가 많아질수록 그 범위가 넓어진다.
올바른 세상 톺아보기는 진정 보이지 않기에 보지 못하는 부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보려하지 않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데서 출발해야 한다. 이를 바꿔 얘기하면 보려는 부분만 볼 것이 아니라 잘 드러나지 않는 부분도 자각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얼마 전 사설을 통해 '협동조합 90%는 좀비'라는 기사를 내보낸 신문은 2~3년 전 "정부가 인위적으로 협동조합을 늘리려고 나선다면 또 다른 골칫거리를 만들어낼 뿐"이라는 자신들의 경고를 들먹이며 "내 이럴 줄 알았다"는 식의 보도를 쏟아 부었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협동조합을 늘리려는 이유는 좀비기업을 양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경제는 우리 시대가 직면한 시장경제의 도전, 즉 사회를 경쟁적, 비인간적으로 황폐화시키는 탐욕에 대한 응전이다.
'협동조합 90%가 좀비'라는 말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신자유주의 경제의 이면에 활개치는 뱀파이어들이 우리 사회를 온통 물화(物化)시킨 방증이 아니겠는가.
미국 사회학자 로버트 매키버(R.M. Maciver)의 말처럼 우리시대가 필요로 하는 것은 인간적 삶에 본질적으로 필요한 가치를 확립하는 것이다. 바로 '타인에 대한 배려'라는 가치이다. 배려는 외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배려할 수 있는 사회적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이를 개인이 하기에는 너무나 힘겨운 일들이다. 의당 중앙정부나 지자체에서 그러한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
그러한 토대 위에 사회 구성원 각자는 세상의 사각지대를 줄이기 위해 협동조합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협동조합의 '다원성(plurality)'에서 찾을 수 있다. 협동조합은 소유주가 1인이나 소수가 아니라 사회 각계각층의 다수인이고, 그 구성원 모두가 이용하며 통제한다. 더불어 협동조합의 가치에는 '자유'를 명기하지 않았다. 이는 자유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자유보다 '평등'을 몸통으로 본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대내외적으로 '공정'의 기치를 내세운다. 그래서 협동조합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면 소득기준을 잣대로 배분을 가늠하는 사회에 소유기준의 세상을 보게 해준다. 나눔의 기준이 소득과 더불어 소유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출발점이 같을 때에는 소득만으로도 나눔의 기준점을 삼으면 문제되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날 세상은 계층 간의 간극이 너무 벌어졌다.
우리 세상에 어둠의 사각지대에 머무는 이가 없도록 하고 선대가 물려준 부를 고스란히 받은 자들의 '갑질'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곰곰이 되씹어 볼 때이다.
경남도민일보 2015년 11월 3일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