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당(唐) 현종(玄宗) 때의 재상(宰相)으로 아첨을 일삼고 유능한 관리들을 배척하여 ‘구밀복검(口蜜腹劍)’이라는 말을 낳았으며, 당(唐)을 쇠퇴의 길로 이끈 인물로 여겨지고 있다.
출생-사망 |
? ~ 752 |
호 |
월당(月堂) |
국적 |
중국 당 |
활동분야 |
정치 |
아명(兒名)은 가노(哥奴)이며, 호(號)는 월당(月堂)이다. 산시[陝西] 출신이며 당(唐) 황실(皇室)의 종친(宗親)으로 당(唐)을 건국한 고조(高祖, 재위 618~626) 이연(李淵)의 할아버지인 태조(太祖) 이호(李虎)의 5세손(五世孫)이다. 당(唐) 현종(玄宗, 재위 712~756) 때인 734년(開元 22년)부터 752년(天寶 11년)까지 재상(宰相)을 지내며 커다란 권세(權勢)를 행사하였다. 죽은 뒤 태위(太尉)와 양주대도독(揚州大都督)으로 봉(封)해졌지만, 양국충(楊國忠, ?~756)에 의해 관직(官職)을 박탈당하고 부관참시(剖棺斬屍)의 형(刑)을 받았으며, 자손(子孫)들도 모두 유배되었다.
이임보(李林甫)는 재상(宰相)으로 있으면서 법전(法典)을 정비하여 <당률소의(唐律疏議)>를 편판하는 등의 업적을 남기기도 하였지만, 황제의 신임을 배경으로 전권(專權)을 휘두르며 조정(朝廷)의 기강을 크게 문란케하였다. 때문에 그는 당(唐)의 쇠퇴를 가져온 인물로 평가를 받는다. 그는 감언(甘言)으로 황제의 비위를 맞추면서 신료(臣僚)나 백성들의 충언(忠言)이나 간언(諫言)이 전달되지 못하도록 언로(言路)를 막았다. 그리고 자신에 반대하는 대신들을 모함하여 죽이거나 내쫓았으며, 조정(朝廷)의 인사(人事)를 좌지우지(左之右之)하며 유능한 인재들은 배척하고 자신에게 충성하는 사람들만 발탁하여 등용하였다. 이로써 현종이 즉위한 뒤 요숭(姚崇, 650~721), 송경(宋璟, 663~737) 등에 의해 이른바 ‘개원(開元)의 치(治)’라 불리는 성세(盛世)를 누렸던 당(唐)은 급격히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특히 그는 749년(天寶 8년) 변경에서 군공(軍功)을 세운 인물이 조정(朝廷)으로 돌아와 자신의 반대 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을 막기 위해 문사(文士)들이 담당했던 변경의 절도사(節度使)를 이민족(異民族) 출신의 번장(番將)들도 대체하도록 하였다. 그는 현종에게 문사(文士)들을 장수(將帥)로 삼으면 화살과 돌이 비 오듯 쏟아지는 전장에서 무서워 군대를 지휘하지 못하므로 용맹한 한족(寒族)이나 번인(蕃人)을 장수(將帥)로 삼는 것이 낫다고 상주(上奏)하였고, 현종은 이를 받아들여 안녹산(安祿山, 703~757), 고선지(高仙芝, ?~755), 가서한(哥舒翰, ?~757) 등을 절도사(節度使)와 장군(將軍)으로 임명해 변경을 지키게 하였다. 이는 결국 뒷날 안사(安史)의 난(亂)이 일어나는 배경이 되었다.
또한 이임보는 성격이 음험(陰險)하고 정치적 수완과 모함에 능해 간신(奸臣)의 전형(典型)처럼 여겨진다. <자치통감(資治通鑑)>이나 <십팔사략(十八史略)> 등에는 그가 현명한 사람을 미워하고 능력있는 사람을 질투하여 자기보다 나은 사람을 배척하고 억누르는 음험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가 밤에 자신의 서재인 언월당(偃月堂)에서 깊게 생각을 하면 누군가가 주살(誅殺)되거나 감옥에 갇히는 일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겉으로는 감언(甘言)을 일삼으며 절친한 척하지만 뒤에서는 음해(陰害)와 모함(謀陷)을 일삼아 세인(世人)들이 그를 “입에는 꿀이 있고, 뱃속에는 칼이 있다(口有蜜 腹有劒)”고 평했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여기에서 ‘구밀복검(口蜜腹劍)’이라는 말이 생겼다.